박영호 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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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 소설 연구 - 박영호
제목  [15회] 미주한인 소설 연구 (7-1)
등록일  2006-12-25
조회수  629회
미주 힌인 소설연구> 7

3)19 60 년대의 미주 한인 소설
영문 소설   (상)

들어가면서
일제의 압박으로부터의 조국 광복은 우리 민족 역사에 하나의 획기적 사실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암흑과 수탈의 역사인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광복을 맞은 조국은 새로운 모습으로 새 역사의 장을 열어갈 수 있게 되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국광복은 미주의 한인들에게도 직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의식 구조에 이제까지 나라가 없는 민족으로서의 비애나 열등감을 떨치고, 이제 떳떳한 자주국민으로서의 긍지와 자신감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미주에서 맨저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 중의 의 하나가 바로 인구의 유동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조국 광복으로 인해 그동안 유민(流民)의 신분으로 있었던 수 많은 정치적 망명인이나 직식인들이 대거 귀국길에 올랐던 점이 하나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주로 이들에 의해서 발표되어 왔던 미주한인 소설은 자연 공백기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꾸준하게 현지에서 쓰인 국문 소설이 발표되어 오던 신한민보에는 현지 작가에 의한 국문소설의 작품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대량이민이 이루어지던 1970년대 이전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오랜 공백을 맞을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전기한 것처럼 우선 현지 작가의 부재에 있었고, 다음은 바로
독자의 숫적 열세가 문제가 되었으리가고 본다. 이는 그동안 미국정부의 한인 이민 억제정책(1905년부터 시행)으로 인해 미주에 한인 이민이 일찍부터 거의 막혀 있었고, 재미 한인의 태반을 차지했던 하와이 이민 2세들이 한결같이 우리말을 익히지 못했던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은 조국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우선 현실적인 생활 문제 해결에 매어 있어서 그들 자녀들의 모국어 지도에 대한 관심을 기우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현지 작가에 의한 국문 소설을 볼 수 없는 대신에 1950년 초엽부터는 당시 고국에서 유행되고 있던 신문 연재 소설 형태를 모방해서, 미주에서도 본국의 신문처럼 본국의 유명 작가의 작품을 연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춘원 이광수의 장편 소설《선도자》(96회 1951-1953)와 《운명》(1957), 그리고 단편 소설인 유호의 《하우두 유두》(1957)와 김동리의 《용》(1958) 등이 소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중 이광수의 《선도자》는 2년 이상 연재된 장편소설로 광복 이전 현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데, 작자는 서두에서 이 글을 쓰게된 동기를 “ 이항복을 주인공으로 해서 독립협회와 신민회의에 관계된 독립지사들의 사랑과 풍걸과 함께 이 당시의 우리나라 모습을 그리려 한 것이었다.”라고 표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광복 이전에 재미 한인에 의해서 쓰였던 많은 애국 소설들과 같은 맥락으로 이들의 연장선에서 쓰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작자가  “이것은 물론 소설이오. 실기는 아니다. 그렇지만은 이 글을 쓸 때에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는 사실을 충실하려 하였다”(신한민보. 1951,) 는 표현으로 보아 소설적 구성 면에서는 과거 현지 작가들의 작품보다는 좀더 진전된 작품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과거사의 이야기들이고 내용 역시 새로운 점이 없어 문학사적으로 그 의의를 재론할 가치가 없을 것이다.
아무튼 미주 한인작가에 의한 국문 소설은 조국 광복과 함께 상당히 오랜 동안 공백기를 거쳐 1970년대에 가서야 새로 시작되었던 한인 대량이민(케네디 뉴프론티어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 1968)과 함께 다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미주 한인 국문 소설의 긴 공백을 1950년대와 60 년대에 나타난 한인 영문 소설들이 이를 메꾸어주고 있다. 1954년에 『구월의 원숭이』 (September Monky)를 발표한 박인덕과 1956년에『꽃신』』 (Wedding Shose)으로 등장한 김용익과 1964 년에 『순교자』(Martyre)등을 발표한 김은국 등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광복이후의 미주 한인 소설은 잠시 공백기를 거쳤다가 195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영문소설들로 다시 활기를 띄고 있어서 1950년대로부터 1960년대까지를 한 시대로 묶어 1960년대라고 하는 문학사적 시대적 표현을 설정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영문 소설 작가들인 박인덕, 김용익 그리고 김은국 이 세 사람들은 모두 1930년대의 유일한이나 강용흘과 같은 이민 1세들로서 그들은 모두가 한국에서 출생하여 한국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의식 세계 역시 전기한 한인 영문 소설 작가들처럼 한국적일 수밖에 없고, 그들이 쓰고 있는 작품세계도 여전히 한국의 이야기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소설의 중심 주제는 여전히 조국의 주체성에 대한 고수이면서 정체성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이 시기의 소설 들이 시대적 배경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여전히 과거의 고국의 암울한 민족적 시련이나 고통 등이 표현되고 있고, 광복이후의 전쟁이라고 하는 민족비극의 참상이나 혼란 등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의식세계나 정서에 대한 표현이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여전히 한국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그 구체적인 주제는 삼십년대의 작품 세계와는 달리 그 내용과 주제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 점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종전에는 볼 수 없었던 한국 전쟁과 같은 시대적 특성과 함께 그러한 절박한 현실 속에서의 인간과 신의 관게난 영혼의 문제 등 종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인간 구원에 대한 문제 등에 대한 철학적인 주제가 표현되고 있고, 한국 여성 문제 등을 다룬 페미니즘적 문제가 등장하고 있고, 형식적인 면에서도 종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인물의 성격묘사를 위주로 하는 순수 단편 소설 등이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자전적인 형식을 통해 개인의 시련과 함께 국가적 시련이나 애국 구국운동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30년대의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맨 먼저 발표된 영문소설인 박인덕의 『구월의 원숭이』(September monkey1954)는 이전의 소설과 같이 광복이전의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서 조국의 암울한 모습이나 애국이나 구국정신이 표현된 작품이지만, 기독교 정신이라고 하는 새로운 정신 문화와 함께 한국 최초로 여성 문제를 다룬 한국 최초의 여성 영문 작품이라는 점이 우선 하나의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고, 다음으로 등장한 김용익은 그의 대표작인 『꽃신』(wedding shoues) 등을 통해서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나 정신 세계의 일부를 극히 미학적으로 표현한 철저하게 한국적인 소설을, 그리고 김은국은 <순교자>를 통해서 인간과 신의 관계를 파헤지고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인 인간 구원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어서 주제를 다룬 면에서는 30년대의 재미 한인 작가와는 전혀 다름 양상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은국은 1930년대의 강용흘처럼 미주 문단으로부터 대단한 찬사와 관심을 끌었던 작가로, 그는 미주 한인 소설가로서는 처음으로 소설 분야에서 20주 동안 줄곳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1969년에는 우리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로정식 선정되었었던 점은 특기할만하다.
일찍이 강용흘의 <초당』과 50년대의 박인덕의 『구월의 원숭이』도 현지의 비소설 부분에서 수주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라 관심을 끌었으나, 이들은 자전적 소설이라는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고, 또한 그들은 동양사상이나 고국의 정서에 바탕을 둔 개인의 꿈을 다룬 소설인 점에 비해, 김은국은 동양적인 사상이나 시대적인 특성에 한정되지 않는 극히 보편적인 인류의 문제라 할 수 있는 보다 근원적인 인간의 영혼 구원과 사랑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고, 자전적 소설의 형식을 벗어난 완전한 소설 형식을 갖춘 작품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획기적인 변화임에 틀림이 없고, 더욱이나 이 시기의 미국 문학이 대전이후 새로 일기시작한 흑인들의 민권운동 문학과 더불어 유태계 문학자들에 의한 소수민족문학 운동이 일기 시작한 때여서 김은국의 작품발표와 그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소수민족 문학의 태동과도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걱이다. 따라서 그는 미국 문학사에 있어서도 미국 소수민족 문학의 시발점에 있었던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이러한 한인 영문 소설작가들이 있었기에 이들의 정신이 다음 80년대의 1.5세나 2세들에 이어져, 한인 아메리칸 소설 문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힐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60년대의 재미한인 영문소설들이 지니고있는 그 특별한 가치는 일찍이 1930년대의 강용흘과 함께 우리의 문화와 문학을 서구에 소개하여 우리 주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라고 할 수 있고, 나아가서 소설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1930년대 작가들보다도 더 높은 수준으로 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어서,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초석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국에서도 현재 이들에 대한 연구나 비평이 상당한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도 그렇게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며, 또한 비평 부분에 있어서도 특별한 가치 연구 보다는 비판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많고. 더러는 폄하되기도 한다.
결국 본국에서는 이러한 재미한인 영문 소설을 포함한 재외 동포문학을 순 우리문학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지않고, 아직도 경계문학내지 변방문학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재외 동포문학이 지니고 있는 그 특별한 가치 설정 보다는 우선 주체성이나 민족 정신 등을 우선으로 기대해 보는 그런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에서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일찍이 강용흘이나 김은국의 작품들은 일찍이 이곳에서 수주 동안 베스트 셀러에 올랐고, 이십여 개 국어로 번역 소개되는 등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던 작품이었음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은 현재 많은 국내 작가들의 작품이 외국어로 많이 번역되고 있고, 몇몇 작가들은 스스로 노벨상 수상을 운운 하고 있으나, 사실 그분들의 작품이 해외에서 실제 얼마나 읽히고 있느냐 하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들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작품을 서얼문학이나 변방문학 같은 위치에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될 것이고, 글로벌 문학이라고 하는 개념에서라도 이들 작품의 참된 가치와 그 업적을 우선 밝히고, 나아가서 우리 문학의 세계화와 그 영역확대를 위해서라도 이들의 작품을 하루 속히 우리 국문학에 적극 수용해야 하고, 한국 민족문학이라고 하는 광의의 국문학 개념에 포함시켜야 하리라고 믿는다.

박인덕(朴 姙德  Induk Pahk 銀峰1986-1980)
광복 이후 미주에서 최초로 쓰인 한인 영문 소설은 1954년에 박인덕에 의해 발표된『구월의 원숭이』이다.
이 작품은 작자가 자신의 출생부터 성장, 그리고 미국 유학과정과 자신이 자시늬 꿈을 실현한 그 과정을 적은 일종의 자전적 소설이다. 따라서 내용은 30년대의 한인 영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내용들이고, 그가 성장했던 고국의 그 암울한 시대적 배경을 소개함으로써 조국의 문화와 역사적 현실, 그리고 조국에 대한 애국정신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은 출생시기가 비슷한 강용흘의 <초당』작품의 내용과 흡사한 점이 많다. 우선 성장시기에 둘 다 남다른 꿈을 지닌 점이나 국가가 패망해가는 과정과 일제의 강점기 라는 어려움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 미국 유학의 꿈을 이룬 점이나, 두 분 다 강연을 통해서도 고국의 현실과 문화를 소개했던 점은 아주 흡사하다. 다만 강용흘의 꿈은 새로운 학문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이었고 이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녀의 꿈은 신앙과 여성운동과 교육에 대한 꿈이었고 그녀는 고국에 돌아와 이를 성취했다.
이 작품은 고국에서는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픔이지만, 현지에서는 당시 한동안 미 서점가에서 비소설 부문에서 베스트 셀러에 올랐던 작품이고, 뉴욕 타임즈에서는 그녀를 ‘동양에서 온 선교사의 기록 ‘이라고 지칭했을 정도로 널리 소개됐던 작품이다. 이 작품이 그렇게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한 동양 여성인 그녀가 국가적 시대적 어려운 환경에서 이를 극복하고, 봉건 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신앙인으로서 그녀의 꿈인 교육의 꿈과 사회적인 꿈을 함께 이룰 수 있었던 입지전적인 그녀의 생애에 많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우선 우리 민족혼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민족 주체성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다음으로는 미주에서 한국여성이 쓴 최초의 영문소설이라는점에서 특별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색은 무엇보다도 작자가 여성이라는 점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여성문제를 다룬 최초의 페미니즘적 표현을 나타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 소설을 통해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늦게까지 그 잔재를 드리우고 있던 봉건사회의 잔상인 남존여비나 여필 종부 같은 구습을 탈피하기 위해서 남녀 평등사상이나 여성 권리신장 등을 위해 계몽운동을 펼쳤고, 실제로 그녀는 슷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법적 이혼을 했던 그 시대로서는 보기힘든 여성 개혁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그녀에 대해 “한국에 새로운 여성 시대가 도래했다면, 그것은 그녀가 성취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평했던 작가 노르먼 빈센트 피얼의 서평에서도 잘 엿 볼 수가 있다.
원래 그녀가 이 소설을 쓴 목적은 그녀가 미주에서 평소 꿈꾸어 오던 한국 베리아 (Berea In Korea)의 기금 확보에 진전이 없자, 이에 대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였다, 이러한 점은 책의 제 1면지에 “아직 태어나지않은 한국의 베리아에게 바친다.” (“To Berea in Korea’-as unborn”)라고 쓴 헌정문에서 엿볼 수 있다. 그녀는 이 소설 판매의 수익금과 강연 수입을 합한 20만불로 워싱턴에서 한국 베리아 재단(Berea In Korea Foundation)을 설립하고 이를 계기로 그의 평생의 꿈인 교육사업의 숙원을 한국에 이룰 수 있게 된다.

(1) 박인덕 (朴 姙德  Induk Pahk 銀峰1986-1980)의 생애
박인덕은 1896년 9월 24일 평난 진남포 부근 민량틀 마을에서 유학자 부친 박영헌씨와 어머니 김온유 (金溫柔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유학자로 과거시험인 대과에 응시했던 한학자로 과거제도가 없어지가 고향에 서 서당을 열었던 교육자다. 그는 그녀의 사주가 丙申年 酉月 龍日 寅時에 태어난 그녀의 특별한 사주를 보고 그녀가 뛰어난 인물이 되라는 기대에서 그녀의 이름을 임덕(姙德)에서 인덕(仁德)이라는 사내 이름으로 고쳐서 그녀를 사내와 다름없이 엄격하게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부친은 그녀를 남장을 시키고 마을 선생에게 데리고 가서 한글 교육을 부탁해서 2주만에 한글을 깨우치고 3개월만에 천자문을 익힐 정도로 머리가 명석했다. 그러나 그녀기 일곱살 되던해 마을에 전염병인 콜래라가 발생해서 그의 부친과 그녀의 남동생이 죽는 불행을 당한다. 이로 인해 그의 모친은 홀로 가정을 이끌어 가야 했으나, 남다르게 정신력이 강하고 생활력이 강한 그의 모친은 이를 극복하고 그녀의 교육에 온 힘을 기울인다.
무엇보다도 그의 모친은 일찍이 기독교에 귀의하여 그녀에게 신앙심을 심어 주었고, 이로 인해 그녀는 수많은 어려움을 이 종교적인 힘으로 극복해 나가게 되고 그녀가 꿈을 이루어 가는데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8세 때에 진남포에 있는 미션 계통의 학교인 삼승 여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했고, 그녀의 학비를 조달하고 있던 그녀의 모친은 그녀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방물 장사를 하며 매일 32 Km범위의 길을 걸어다녔다고 하고, 그녀가 그녀의 어머니가 그리워 6Km의 밤길을 걸어 찾아갔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만나지 않고 문전에서 그대로 돌려보내 한석봉의 어머니와 같은 본을 보이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녀는 12살 되던 어린 나이에 벌써 “고통은 기쁨의 씨앗“이라는 성경 시편을 주제로 전교생앞에서 연설을 해서 장차 위대한 연설가가 되리라는 예견을 낳게도 했다.
그녀는 여학교를 졸업하고 그녀의 친구인 윤성심과 함께 무작정 서울에 상경해서 이화학당의 교장 루루 프라이(LuluE.Frey)를 감동시킨 끝에 이화 학당에 입학하여 미국 후원자 스타인 하트 (C.G Stain hart. Illinois)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서 공부할 수 있게 되어, 그녀는 이화 학당에서 홀로 3회 졸업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화 학당에 남아서 중등부와 고등부의 교사로 후배교육에 힘을 기우리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1919년 삼일 독립운동 가담 및 선동 혐의로 수업도중 동료교사 신준과 함께1919년 3월 10일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때 그녀는 같은 감옥에 갇혀 지내던 제자 유관순과 직접 만나 유관순으로부터 “ 선생님, 저는 각오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저는죽어도 좋습니다.”라는 말을 들었고, 결국 그녀는 순국했다. 훗날 그는 신봉조 교장과 함께 이를 세상에 알리는 증인이 되었고, 유관순이 순국녀의 표상이 되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감옥에서 4개월 후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0월에 다시 애국여성 단체 가입 문제로 투옥되어 1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다.
이 때 평소 그녀의 능력을 아끼던 이화대학 2대 교장 아펜셸러 (Appenzeller)가 미국 웨슬리언 대학(Ohio Wesleyan Collage)의 장각금을 받아서 그녀에게 유학의 길을 마련해 주었지만, 그녀는 그 당시 청혼이 들어와 있어서, 결혼과 유학의 길을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유학을 포기하고 김운호와 결혼(1920,7,7)을 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그녀는 그를 지지하고 기대했던 이화인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 주게 된다. 그녀는 1923년 9월 조선 기독교 절제회를 설립하여 회장이 되고, 금주 금연 등 사회 계몽운동에 헌신하였고 배화여학교(1921-1026)에서 영어와 음악을 지도했다, 그러나 그 당시 부호의 아들이었던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평탄치 못하게 되자, 그녀는 다시 유학의 꿈을 꾸게 되고, 1926년 배화학교 음악담당인 동료교사 르비에 이 (miss Rubie Lee)여사의 주선으로 다시 웨슬리언 대학(Georgia 주 macon 소재)의 장학금을 받아 1926년 8월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녀는 웨슬리안 대학에 입학(1926 9월 15)하여 1928년 B.A. 학위를 받았고, 다시 1930년에 콜럼비아대학 사범대학(Teacher’s Collage of Columbia Unibersity)에서 MA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녀는 입학 첫날 전교생 앞에서 ‘기독교가 나에게 의미 했던 것’ (what Christianity Means to Me)이라는 제목으로 첫 즉흥 간증 연설을 했고, 그녀는 1928년 뉴욕에서 설립된 조선 여성 단체인 근화회(槿化會)에 참여하여 김 마리아, 황애덕, 등과 함께 출판물과 순회강연 등을 통하여 주로 고국의 정세를 외국에 소개하는 일을 했다. 또한 그녀는 마국 학생자원 순회 선교단 (Student VolunteerMovement)에 지원하여 미국 각지의 대학을 4회에 걸쳐 순회 하면서 216회의 강연을 실시하여 그녀를 ‘동양에서 온 선교사’라고 이름을 떨쳤고,, 또한 문화 사절로 4백 3만 km를 여행하면서 그녀는 강연을 통해 고국의 문화와 고국이 일제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는 어려운 실정을 소개했다.
그녀는 4년 6개월의 교육을 마치고, 귀국길에 그녀는 다시 세계 강연 계획에 따라 유럽 (캠브리지 대학등 23개 대학) 각국 대학과 동남아시아 및 중국을 거쳐서 1931년 10월에 귀국했다. 그녀가 귀국하자 56명의 지식인들이 윤치호를 중심으로 명월관에서 대대적인 환영회가 개최되었다. (이화 여대 80년사)  
그러나 그가 미국에서 보내준 두 딸의 양육비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의 소식을 듣고 이혼을 결심 하게 된다. 결국 그녀는 1931년 가을에 이혼을 단행해서 우리나라 이혼 여성 1호가 되었다. 이로써 그녀는 당시에 여성 평등사상의 기수가 되었으며 한국의 노라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예상했던대로 이혼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무척 어려운 처지에 이르게 되지만, 그러나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여성계몽 및 여권 신장에 힘을 기우렸고, 1932년에는 최활란 황애덕과 함께 조선직업 부인회를 조직하고 여성들의 실업 경제활동을 위해 힘을 기우렸다.
당시의 민족주의 농촌 계몽 운동인들은 주로 평등분배를 주장하는 협동조합 운동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니, 그녀는 분배 투쟁보다는 실력배양과 생산 증진 등에 힘을 썼고, 계몽운동이나 여권 신장운동과, 그리고 금연, 금주 등의 종교적인 강연을 통해서 주로 (케네디 뉴프론티어 정책 실시 1968) 여성 계몽 운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녀는 1935년에 다시 도미하게 되고 이어서 1936년부터 시작된 신앙 간증 연설은 20개월동안 러시아와 유럽 각국과 중국 등 동남 아시아 등 팔만 마일 가꺼운 거리를 여행하면서 여성 계몽과 선교를 위해 642회의 연설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1937년에 귀국했고, 1938년부터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일본어만을 학교에서 가르치게 되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일본 녹기연맹(綠旗聯盟)의 쓰에(須江愛子)에게 일본어를 배우고, 이를 계기로 일본 정부 녹기연맹의 (綠旗聯盟)의 도움으로 1941년에 고등여학교 졸업자를 위한 직업교육 학교인 덕화여숙(德和女熟)을 설립하여여 여성직업 교육과 사회활동에에 힘을 기우리지만, 이러한 사회 교육활동을 통해 다른 많은 여성교육자나 여성운동가와 다름없이 전쟁에 광분하고 있는 일제의 선전활동에 연사로 나가게 되고, 반민족적 친일 행위를 하게되었음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대표적인 친일운동의 하나가 김활란 윤치호 김동환씨 등과 함께 일본을 위한 임전대책위원회 위원이 되어 많은 독전 연설활동에 참여했던 점이다.
해방이 되자 그녀는1945년 12월에 애국여성단체 정치교육위원장이 되어 한국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획득하고 이에 대한 준비 교육에 관여한 것을 시작으로 1946년에 독립촉성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민주주의와 여성’ 이라는 주제로 각지에서 연사로 활동했고, 미군 군정청에 의해 미국에서 개최된 제 1회 여성국제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게 된 것을 계기로 다시 미국에서 많은 강연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미국 교육재단인 베리아 재단(Berea Foundation)에서 많은 감동을 받고 이와 같은 취지의 교육재단인 한국의 베리아(Berea in Korea)를 한국에 설립할 꿈을 지니게 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모금운동에 나선다. 이래서 장차 그녀의 실업 교육 기관 설립의 꿈인 한국 베리아의 꿈이 한국에서 실현되게 된다.
그녀는 강연의 수입금만으로는 이의 기금 마련이 힘들게되자, 이를 마련하기 위해 1954년에 자전적 소설인 『구월의 원숭이』를 발표하였고, 이 작품은 비소설 부분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유럽 각국에도 번역 소개 되었다.
그녀는 그동안 모아온 강연 수입과 저서 수입금 20만불을 자산으로 1955년 9월에 미국 워싱톤에서  (berea in Korea Foundation)베리아 재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의 효과적인 진행을 위해 그녀는 정부에 영구체류 비자 신청을 했고, 그녀는 1955년 상원의원인 제임스 데이빗 후원으로 상하원 만장일치 가결(미의회 특별법안 2954호)로 영구비자를 획득 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이 기금을 확충시켜 1963년 9월 서울에 인덕 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그의 실업 교육에 대한 꿈을 실현하게된다,  
그녀는 전 생애를 통해 211만 마일의 여행과 80회의 미국 대륙횡단과 총 6680회의 강연을 했다. (이화대학 80년사)
그녀는 1965년에 다시 『인시』(寅時, The out of tiger) 라는 작품을 발표했고, 1970년에는 『용의 지혜』(The Wisdom ofThe Dragon)를, 그리고 1977년에는 『새벽 닭은 아직도 운다』 (The Cock Still Crows)를 발표하였고 『덴마크의 공민고등학교』『농촌지도서』『세계일주기』등의 일반 도서와, 신앙서적 『애루살렘에사 에루살렘』『어리신 주 예수』를 번역하기도 했다.
그녀는 1972년에 다시 인덕 전문대학을 설립했고, AID 기금 지원을 받아서 후일 4년제 정규대학으로 발전시키게 되어 결국 그녀의 베리아 교육에 대한 꿈을 모두 이룩하고, 그녀는 1980 년 4월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녀는 실로 뛰어난 독립운동가이면서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였고, 웅변가 교육자, 선교사, 농민 운동가, 그리고 신앙인이며 훌륭한 저술가 였다.

(2)『구월의 원숭이 』( September Monky 1954)
이 소설은 그녀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그의 출생부터 미국유학시절까지의 자전적 내요을 적은 쪽의 자전적 소설로 1954년 뉴욕 harper &Broter 사에서 출간했다. 이 소설이 출간되자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뉴욕 타임즈에서는 ‘한국에서 온 선교사’  (Ambassador from korea. N.Y Times 11.7.1954)라는 타이틀로 장문의 서평이 실렸고, 초판 오천부가 3 주만에 매진되어 비소설 부분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어서 영국 골렌츠사(gollancz)에서 출판되어 호주 남미 등 6개국에 발매되고, 다음해에 독일의 두 출판사에서 동시에 발행이 되었고, 소경을 위한 점자로도 출판이 되어, 그녀의 미국 유학의 장학금을 지불했던 미국 맹인 은인에게 감동의 보답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녀가 여성으로서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그의 인생역정에 많은 찬사들을 보냈다. 그 구체적 서평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존 하지장군(Genaral Jhon R. hodge)은 “나는 한국에 관심을 지닌 모든 분들에게 이책을 추천하고 싶다. 그녀는 그의 사람들에게 뛰어나게 깊은 사랑을 지닌 훌륭한 교육자이며 대연설가인 한국의 한 뛰어난 여인이다. 구월의 원숭이는 한국을 재건한 종교의 힘과 사회 경제 정치에 대한 훌륭한 지도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다음으로 놀먼 빈센트 피얼(Norman Vincent Peale) 작가는  “많은 자애를 극복하고, 기독도 교인의 인내를 보여준 한 한국 여인의 생애에 대한 놀라운 작품이다.” 라고 말하고 인도네시아 작가인 마가렛 해르먼 브로 (Marguueritte Harmon Bro, Author)는”놀랍고 가슴 훈훈한 생애다. 또한 이 책은 언제나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지닌 작은 나라의 한 굳건한 여인인 그녀의 모친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다. 두번째로 이 소설의 배경을 통해서 한국의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ㅡ” 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 역시 유학생의 신분이어서 이전의 유일한과 강용흘 등과 같이 이민 일세나 다름업지만 그녀의 영문은 앞서의 작자들의 문장보다 여성적인 섬세함으로 훨씬 더 미국적으로 유창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녀의 작품이 다분히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간증과 선교적인 정신이 나타나 있는 점이 이 책이 관심을 끌 수 있었던 점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원래 그녀가 이 소설을 쓴 목적은 평소 꿈꾸어 오던 교육사업의 꿈인 한국 베리아 재단(Berea In Korea Foundation) 기금 확보에 진전이 없자, 이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 첫째 목적이었다, 베리아 대학 학장인 허친스 박사가  그녀에게 “ 어린시절 교회에서 받았던 그 연필로 한국의 베리아를 시작하시지요.”라는 말에 게시를 받아 곧바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점은 책의 제 1면지에 ‘To Berea in Korea’-as unborn(아직 태어나지않은 한국의 베리아에게 바친다.)라고 쓴 헌정문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이 소설 판매의 수입금과 강연 수입을 합한 20만불로 워싱턴에서 한국 베리아 재단(Berea In Korea Foundation)을 설립하고 이를 계기로 그의 평생의 꿈인 교육사업의 숙원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우선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색은 한국여성에 의해서 최초로 쓰인 한인 영문 소설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우리나라 여성에 대한 최초의 페미니즘적인 소설이라는 점이 가장 큰 가치라고 할 수 있고, 그리고 또 하나의 특색은 일제의 암울했던 치욕의 역사에 대한 하나의 증언이어서 우리 민족의 혼의 표현이나 독립정신의 구현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을 통해서 작자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고 있고, 아울러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고 있던 조국의 현실를 밝히고, 그러한 어려움을 굳은 의지와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여성운동과 교육에 대한 꿈과 실해해 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작품의 시작은 그녀의 출생에 대한 것으로 남다른 사주를 타고 태어난 점과 함께 여성비하의 봉건사회의 시대적인 풍습이 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내가 원숭이의 해, 닭의 달, 용의 날 그리고 호랑이 시에 태어난 것을 본 내 아버지는 “만약 이 아이가 오직 사내였다면 크게 출세할 수 있었을 것을! 그녀가 지닌 비범한 생애처럼. 말이야” 하고 불평을 털어 놓았다.. 어머니는 혼자서 미소를 지으며 “원숭이 해라.. 그녀는 원숭이 띠니 그녀는 무척 영리할 것입니다.”하고 그들은 함께 나를 위안시켜 주었다.. (P 14)
이처럼 그녀는 남다른 사주를 타고 났고 이로 인해서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남다른 정성을 기우는데, 우선 그녀에게 소년처럼 남장을 시키고 이름 역시 임덕에서 인덕으로 바꿨는데, 그 뜻은 자비와 덕을 지닌다 뜻이다.
이렇게 성장하게된 그녀는 역시 어려서부터 남다른 꿈을 지니게 되는데, 어머니가 맨 처음 들려주는 이야기는 옛날 중국 이야기로 젊고 잘 생긴 소녀가 병사복을 입고 전쟁에 나가, 그녀는 장군과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로, 그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마치 그 소녀 병사가 된 것처럼 흥분하곤 했었다. 또한 그녀는 어려서부터 먼 바다를 바라 보면서 꿈을 키우게 된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서서 항구 안팎에서 작은 보트들과 외국의 큰 증기선이 떠다니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나는 가끔 집 뒤에 있는 언덛에 올라가 반찬을 만들 나물을 캤다. 그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않았지만, 멀리 펴쳐진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중략)  그리고  이 때부터 여행에 대한 충동이 내 안에 강하게  일기시작했다. (p  24)
이처럼 그녀는 어려서부터 바다를 바라보면서 저 바다에서 배를 타고 항해하면 세계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도 그런 곳으로 갈 수 있으리란 꿈을 꾸곤 했다. 다음은 그녀가 처음으로 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기억인데 이 때 받았던 선물에 대한 감동은 잊을 수가 없었고, 다음에 그녀는 이 노랑 연필로 이 작품을 쓰게 된다.
어린이들에게 크리스마스선물에 대한 분배가 끝났을 때, 나에게는 노랑색 책받침과 노랑색 넘버 두 연필이 주어졌다.
노란색 받참과 노란색 연필은 일찍이 가져보지 못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었고, 연필에 새겨진 신기한 넘버 투 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결단력이 강한 여인인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연필과 잭받침을 낭비 하지말고 읽고 쓰기를 익히는데 써야 할 것이다. (p 19)
이처럼 그녀는 어린 시절의 색다른 추억을 통해서 꿈을 지니게 되는데, 특히 이 노랑 연필 이야기는 그녀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훗날 미국 베리아 대학 총장의 이야기에 계시를 받아 이 노랑 넘버 2 연필로 이 <구얼의 원숭이>를 쓰게된다.
그녀기 일곱살 되던해 마을에 전염병인 콜래라가 발생해서 그의 부친과 그녀의 남동생이 죽는 불행을 당한다. 그러나 남다르게 정신력이 강하고 생활력이 강한 그의 모친은 기독교에 귀의 하고 신앙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그녀의 교육에 온 힘을 기울인다.
그녀는 모친의 지극한 정성으로 삼성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화학당에 입학을 하려는 꿈을 지니고 상경을 하지만, 재정문제를 이유로 교장으로부터 입학을 거절 당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교장에게 매달린다.
“그러나 저는 집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화에 입학하려는 적은 돈을 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집에 돌아가려고 했으면 처음에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흘동안의 고집 끝에 교장은 일찍이 자긴의 생애에 일찍이 보지 못한 고집 세고 의지가 강한 소녀에게 항복했고, 나를 그냥 머물게 하면서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기로 했다. (p 47)
이처럼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굳은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교장이 주선한 장학금 때문이기도 했지만, 행상을 하면서 그녀를 뒷바라지 했던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과 희생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작품에 표현되는 것이 바로 조국의 암울했던 시대적 역사적인 모습이다. 그녀는 그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눈에 비쳤던 당시의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서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민족적 수난과 고통이 잘 표현되고 있어서 이 작품은 자전적인 한 개인의 기록만이 아닌 우리 민족의 산 역사가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녀의 족과 민족에 대한 사랑의 정신이 표현되고 있는점 또한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한 특별한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그녀가 교단에 있을 때 발생한 삼일운동에 관여한 혐의로 옥고를 치르게 되던 중 그곳에서 만나 보게된 유관순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시간. 법정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전 내 학생이었던 유관순을 보았다. 그녀 역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나이는 바로 열여섯 살이었다. … 그녀는 독립운동을 시작하면서 학교를 떠났었다.(중략)나는 이 어린 소녀를 위해서 무엇인가 했어야만 했지만, 나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 지금도까지도 나는 그녀의 고통에 대해서 큰 자책감을 느낀다. 어느 날  밤 나는 그녀가  “ 왜놈들이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형제들과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모든 것을 가져가 버렸다” 라고 울부짖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복역자들을 선동해서 시의를 하면 간수들이 그녀를 밖으로 데려나가 체형을 가했다. 멸달 뒤 그녀는 꿑내 체형으로 죽었다. (p 68)
이러한 유관순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가 감옥에서 나와 세상 사람들에게 알림으로 해서 알려지게 되어, 유관순이 순국녀가 되는데에 이화 교장과 함께 그녀가 산 증인이 되었다
이러한 모든 젊은 날의 시련과 극복은 다음에 그녀가 미국에서 선교강연을 하면서 하나의 간증으로 소개했고, 이를 통해서 고국의 어려움과 함께 우리의 현실을 그들에 소개했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이러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기도로써 하느님에게 구원을 바라고, 그 때마다 이를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지닐 수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더욱이나 그녀는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서 자신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하느님에게 기도하곤 했다
“나는 하느님에게 바다가 모든 물을 감싸고 있듯이 내가 인류를 참으로 이해하고 감쌀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게 되기를 도와 달라고 기도했다.” (P 98)
무엇보다고 이 소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그녀의 여성 권리 신장과 남녀 평등 사상에 대한 표현이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아직 용납이 되지않던 어려운 시대에 스스로 이혼을 단행함으로써 손수 여성 해방과 남녀 평등사상을 실행에 옮긴 한국 최초의 여성운동 선구자가 되었다. 그녀는 첫번째 미국 유학의 기회를 저버리고 결혼을 했지만 행복하지 못했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그녀는 남편의 방탕한 생활을 보고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나는 그와 이혼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기독교인을 사는 방법을 배웠는데, 그는 사는 방법이 틀리고, 내 영향으로는 그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 나는 많은 여성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남편에게 이혼 청구를 해야겠다고 결정을 했다. (P 165 )
“사랑 없는 가정,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을 따라 한 몸을 묻어버릴 수 없고, 무지한 남편을 부양하는데 일생을 허비할 수도 없으며, 배운 지식과 능력으로 일생을 사회사업에 바치겠다.”(p 166)
그리고 그녀는 당시에 사회적으로 생각하기 조차 힘든 이혼을 선언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녀의 이혼 문제는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사회의 반응은 우선 대체로 냉담했다. 당시 모 잡지의 “박인덕 여사의 이혼에 대한 사회적 비판’ 이란 기사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우선 당시 조선 감리교회 총리사 양주삼 씨는 (“ 이혼은 불가능합니다. …간음죄 이외에는 이혼을 불허하게 되어 있습니다….물론 장래 활동에도 악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기성 종교단체에 들어외서는 활동할 수가 없게 되겠음으로….)하고 말하고 있고, 조선주일학교 연합회회장 김창준 씨 역시 “ 당분간은 선두에 나서지 말고 숨어서 근신하는 것이 가하겠고,…만약 재혼하면 그것은 음행이니까 교회로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당시의 사회에서 이혼이 결코 용납되지 않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다만, 당시의 동아일보 기자인 이 청전씨는의 “ 이혼이나 결혼은 당사자끼리 하는 일이니 남이 이렇다 저렇다 시비할 수 없겠지요.’”하는 말이나. 이화 전문학교 이온상씨의 “ 도시 모를 일.” 이라는 표현은 그래도 상당히 긍정적인 표현에 까까운 점이 이색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녀가 몸담고 있는 종교계에서 조차도 이해를 밭지 못하고 그를 배척했던 점에서도 잘 였볼 수 있다. 아무튼 그녀는 이러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결국 이혼에 성공하여 우리나라 법적 이혼의 제 1호가 된 셈이다.
따라서 본인 스스로가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보수 관념의 하나인 여필종부라고 하는 불평등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 남녀 평등이라고 하는 정신을 손수 표현해 보인 점이 더욱 이색적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나 그녀는 이혼 이후 여성 직업 교육을 위해 힘쓰고 여성 교육과 계몽활동에 힘을 기우리게 됨으로써 그녀는 한국의 여성운동의 선구자적인 기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러한 여러 어려움과 경험을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 간증을 통해서 복음과 함께 전달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나는 웨슬리안 대학에서 처음 강연을 했을 때 나는 한국에서 내가 남학생의 학교에 다닐 때 의 결험을 말해주고 아울러 내가 일본인의 감옥에 오년 반동안 갇혀 있을 때 하느님이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을 간증했었다. ‘(P 119)
다음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을 두고 모 작가는 이책은 그녀의 자서전이면서 그녀 어머니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평하고 있듯이,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모든 감화를 받았고 그녀가 이룬 꿈은 그녀의 어머니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녀가 이화로 떠나던 전날 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한던 말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 너는 내 아들이다.  부디 굳세어라.“ 내가 너에게 준 이름을 기억하거라. 나에게는 어려움이 문제가 되지않았고 결코 넘어지지 않았다. 주님을 믿고 너 자신과 네가 할 일을 해라. 그러면 일은 이루어질 것이다. (p 43)
또한 그녀가 낙담하거나 지쳐있을 때도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곤 했다.
“그녀는 내가 낙심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하느님은 우리 두 사람에게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한 문이 닫히면 언제나 더 좋은 다른문을 열어 놓는다는 가르쳐 주셨다.(p 201)
“만약 네가 네 딸들 생각으로 눈물울 흘리려면 가지말아라.” 하던 어머니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 나는 힘들게 감내하고 내 가슴 속에 속삭였다.” 언젠가는 내 작은 것이라도 당신을 위해서 꼭 이루어내고 당신을 행복하게 해드릴 것입니다.” (p 111)
그녀는 이처럼 자신이 이룬 꿈은 그녀를 위한 것이고, 그것은 결국 그녀의 어머니 꿈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어머니의 딸인 것을 자랑 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내 어머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나는 내 어머니가 전쟁의 아픔으로부터 태어난 새로운 한국에 대해 말했던 것을 되새겨 보고 , 나는 그녀의 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어머님,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p 207)
조국광복과 함께 그녀는 그녀의 꿈이기도 한 여성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고, 한국 여성 대표로 국제 여성회의에 참석을 시작으로 다시 미주 순회 강연을 시작한다.
‘…최초의 세계여성회의에서 전쟁 후의 한국 여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되다니! (p  227).
그녀의 강연 내용은 이 책에 쓰인 모든 것들이어서그녀는 훌륭한 우리나라 문화 사절 이었음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 때 방문한 베리아 대학에서 그녀는 직업 교육에 대한 감동을 받고  “한국의 작은 베리아” (Little Berea in Korea)의 꿈을 지니게 된다. 그녀는 결국 이 소설의 수익금으로 그 교육의 꿈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게 된다. 그녀는 교육의 꿈과 전도사업에 대한 꿈의 이야기를 마자막으로 다음과 같이 이 글을 끝맺고 있다.
어쩌면 한국이 세계 여러 어두운 곳에  불빛을 가져오고 전 세계에 따뜻한 형제애를 가져오는 영광의 횟불이 타오를지 누가 알겠는가? (P 297)

(3) 『인시(寅時, The Houe of The Tiger1965)
이 책은 그녀가 한국 베리아 (Berea in Korea)의 꿈을 지니고, 꾸준히 노력한 나머지 1963년에 실제 인덕 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꿈을 이룬 다음에, 그 동안의 한국 베리아에 대한 자신의 꿈을 지니게 된 동기나 이를 이루기 위한 과정과 그 결실을 이 글을 통해서 적고 있다.  이 작품 역시 그녀의 첫작품 『구월의 원숭이』를 출간했던 하퍼. 로 출판사(Harpe  & Row Publishers, NewYork)에서 1965년에 출간한 것으로 12장으로 나누어 쓴184쪽의 책이다.  이 책에는 가족사진과 함께 베리아에 관계된 많은 사진이 14페이지에 걸쳐 실려있다.
작품 이름을 『<인시>』(寅時)라고 한 것 역시 『구월의 원숭이』처럼 그의 사주(四註) 중의 태어낭 시간 (호랑이 시에 출생)를 표현한 것이다.
이 저서에는 그가 그의 꿈을 설정하고 이루게된 자신의 신앙적인 계시와 신의 도움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는 결국 그의 생애가 신의 가호로 결실을 얻은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이를 그녀는 연설을 통해서 간증의 형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고, 그녀의 한국 베리아 에 대한 교육의 꿈 역시 하느님의 계시와 하는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The  Hour of Tiger. P 39)
“ 나에게 새 세계를 열어준 주었던 웨슬리 대학 학장에게 애정어린 감사와 함께 이 책을 헌정 한다.”라고 첫페이지에 쓰인 작자의 설명처럼 이 책은 그가 어린시절부터 꿈꾸어 온 그의 사회 교육기관 설립에 대한 그의 성취 과정을 기술한 것으로 주로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담과 그녀가 미국에서 활동 중 신의 계시에 의해 지니게된 내력과 그 과정을 적은 일종의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다.
Berea는 원래 캔터키주 베리아에 있는 베리아 칼레지에서 실시하고 있던 ‘일하면서 배우는 학교’ 로서 성경 사도행전 에 있는 도시이름을 딴 것이라 한다. 그녀는 그러한 베리아 대학의 교육 방식에 깊이 감동을 받고,  “하나님, 바로 이것입니다. 베리아 대학이 제가 본받아야 할 바로 그 학교입니다. 제가 베리아를 방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The hour of the Tiger,  p 37)하고 기도했었음을 회상하고 있다. 이어서 그녀는 그곳을 방문하고 그곳의 모든 교육방법을 복 크게 감동을 받았고, 이는 그의 인생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때부러 한국 베리아의 꿈을 지니게 되었다고 회상하고 있다.(The  hour of the Tiger,  p 39)
그녀는 또한 수많은 농촌 운동에 참여했는데 미국과 캐나다에서 소를 살수 있는 기금 모금을 실시했고,(S,M P 187) 덴마크를 다녀온 뒤로는 주로 덴마크식의 농민 운동을 통해서 여성 농민에 대한 교육과 계몽에 심혈을 기우렸다.(The hour of Tiger, P 48)  그녀는 그동안 모아온 강연 수입과 저서 수입금 20만불을 자산으로 1955년 9월에 미국 워싱톤에서 한국 베리아 재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이 기금을 확충시켜 1963년 9월 서울에 인덕 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그의 실업 교육에 대한 꿈을 실현하게된다,  
결국 이 책은 그녀의 실업 교육의 꿈을 이룬 점에 대한 하나의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다.

(4)『 <용의 지혜>( The Wisdom of The Dragon)
  이 책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1970년에 출간된 실용서적인 동양의 속담집이다. 예로부터 많이 쓰이어 오던 속담,격언 등을 모아서 국문이나 한자어로 된 말을 영어로 풀이해 놓은 책으로 총 96쪽으로 되어 있고, 글로리아 김 (Gloria Kim)에 의해서 내용에 걸맞는 삽화를 각 페이지마다 실어서 내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용(龍)을 인용한 것은 동양적인 특색이 나타낸 것과 함께 그녀의 사주 중 그녀가 태어난 날이 용의 날이어서 이를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동양인의 지혜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가 있고, 서양인들에게 동양인들의 전통적인 가치기준과 생활의 지혜를 소개하는 일종의 자료서적으로 활용될 수가 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하나의 생활 지침서라고도 할 수 있다.

(5) 『<새벽 닭은 아직도 운다 >』 (The Cock Still Crowa)
이 책은 1977년에 미국 밴태이지 프레스 사(Vantage Press Inc. N, Y)에서 출간한 140 쪽의 책으로 그녀의 마지막 저서로, 그녀는 그녀의 꿈을 이룩하게 도와준 수도없이 많은 은인들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To my friends in North America with gratitude and love”)으로 이 책을 저술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책의 내용은 앞서의 베리아 꿈을 적은 『인시』(寅時)의 후속편이나 다름 없는 내용으로서 여기에서 새벽 닭을 인용한 것은 그의 사주 중 그가 닭의 달에 출생한 것을 상징하고 있고, 그녀의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한국 베리아 (Berea In Korea )에대한  꿈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상징한 것이다. 내용은 10장으로 나누어 있고 각 장마다 서두에 성경 귀절이나, 우리나라 속담과 문학자들의 경귀 등이 쓰여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녀는 일찍이 이러한 특별한 꿈을 심어주고 그녀가 이러한 꿈을 이룰수 있게 항상 그녀를 일깨워 준 하느님에 대한 감사를 적고 있다. 이어서 그녀가 학교교육을 받는데 장학금으로 그녀에게 도움을 주었던 분들에게 먼저 감사를 표하고,
그녀가 그녀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지 그녀를 도와준 수많은 외국 은인과 그리고 가족과 친지들에 대한 고마운을 회상하고 이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항상 그녀에게 좌우명이 되었던 그녀의 어머니의 신앙심과 바른정신과 여성운동에 특별한 관심에 대한 그녀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 하고, 그녀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모친의 말씀을 다시 한번 회상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다. (그녀의 모친은 1844년 사망)
“내가 기독교인이 된 후로는 내 평생 꿈은 너를 교육시키는데 있었고, 나는 그 꿈을 이루었다. 너에게는 꿈 하나로 족하다. 영원하고 가치있는 꿈을 꾸어라..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할 때까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노력하거라.”(The cock still crows, P 21)
또한 그가 맨 첫날 교회에서 받았던 선물인 H 2 노랑 연필 이야기와, 그 연필로 그녀가 이렇게 글을 쓰게된 필연성 등을 신이 주신 은혜로 생각하며, 다음은 웅변에 대한 이야기로 그녀는 평생 많은 웅변을 했는데, 그녀는 남몰래 많은 노력을 했으며, 특히 입에 자갈을 물고 말하기를 연습했다는 그리스의 대 연설가 데모스테네스 (demosthenese)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녀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베리아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녀가 베리아에 관심을 갖게된 동기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특히 그녀의 베리아 꿈을 지닐 수 있게 게시를 주고 그녀를 곁에서 도와준 하느님과 그 구체적 후원지가 되었던 베리아 대학 허친스(Hurchins)학장과 많은 사람들을 회상한고 있다,(The Cock Still Crows, P, 34 ) 이 일의 진행을 위한 모금 활동을 위해 그녀의 미국 정부에 영구체류 비자 신청을했을 때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미국 상원의원인 제임스 데이빗과 상하원 만장일치의 가결(미의회 특별법안 2954호 1955)로 그에게 영구비자를 획득하게 도왔던 미국 국회 상하원 위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현하고 있다. 그녀는 결국 1963년 9월 서울에 인덕 실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처음으로 교육의 꿈을 실현했고 1975년 에는 이제 2000명이 넘는 맣은 학생을 가르치는 큰 학교로 성장했고, 이제는 대학교로 승격이 되었음을 감회 깊게 느끼고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새벽닭이 아침을 알리는 것처럼 내 꿈은 내 생애의 아침에 시작되었지만, 저녁이 된 지금도 닭은 울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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